상실을 감각하는 두 가지 방식: 런던의 핏빛 심연에서 샌타페이의 나무판까지

터너상 수상자인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대규모 신작 전시가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막을 올렸다. 그의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은 언제나 그렇듯 감각을 철저히 기만당하고 또 압도당한다. 허공에 매달린 핏빛 조각들, 공간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리는 거울 설치물,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텅 빈 심연(void)의 형태들은 단순히 시각적 유희를 넘어선다. 그것들은 우리의 지각과 공간감을 비틀어버리며 숭고함(sublime)이라는 꽤나 다가가기 힘든 영역으로 관람객을 멱살 잡고 끌고 들어간다. 카푸어가 이토록 무형의 왜곡과 철학적 공허를 통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차원을 끄집어낸다면, 이와 대척점에서 지독한 물리적 덩어리와 수작업으로 부재의 감각을 메워나가는 작가가 있다.

샌타페이의 에초 아 마노(Hecho a Mano) 갤러리에서 6월 28일까지 열리는 애널리스 그라토비치(Annalise Gratovich)의 개인전 《집에서 가져온 것들(Carrying Things From Home)》은 카푸어의 전시와는 전혀 다른 온도로 상실을 이야기한다. 갤러리 서문에 던져진 질문은 묵직하다. 전쟁과 이주로 인해 가족과 문화적 뿌리가 통째로 뜯겨 나갔을 때, 우리는 대체 어떻게 자아를 유지하고 낯선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오스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녀의 작업 이면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야밤을 틈타 우크라이나를 탈출해야 했던 조부모의 뼈아픈 가족사가 엉켜 있다. 당시 그들이 당장 품에 안고 뛸 수 있었던 것 외에 그곳에 남겨진 모든 상실과 단절은 작가에게 하나의 미스터리이자 거대한 신화가 되었다. 잃어버린 것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고, 왜 그토록 물질성에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그녀는 판화라는 끈질긴 매체를 통해 파고든다.

전시장에 묵묵히 세워진 8점의 대형 목판화들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뿜어낸다. 2014년부터 최근까지 오랜 시간 깎아낸 이 작품들은 거의 사람 크기에 육박하며, 마치 거대한 토템이나 마트료시카를 연상시킨다. 우크라이나 전통 자수 의상을 걸치고 동식물로 엮은 머리 장식을 얹은 인물들은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맹금류를 든 ‘건축가(The Builder)’나 우주의 소용돌이치는 에너지를 조율하는 ‘치유자(The Healer)’ 같은 작품들에서 엿볼 수 있듯, 인물들은 자연과 기묘하게 혼합되어 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라토비치가 부재를 증명하는 방식은 땀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나무판 하나를 파내는 데만 무려 반년이 걸리는데, 여기에 얇고 다채로운 색지를 붙이는 신 콜레(chine collé) 기법을 접목한다. 71×41인치 크기의 2025년작 ‘바보(The Fool)’와 ‘치유자’를 완성하기 위해 그녀가 직접 손으로 염색해 준비한 종이 조각만 2천 장에 가깝다. 판화 한 장당 대략 70개 남짓한 색지가 들어가는 지난한 작업이다. 이렇게 완성된 거대한 판화는 찍어내는 과정 역시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4×8피트가 훌쩍 넘는 대형 프레스기를 굴리려면 네 명의 작업자가 달라붙어 호흡을 맞춰야 한다. 작가가 이 고된 과정을 두고 “공동체적인 재미가 있다”고 툭 던지듯 말하는 대목은 곱씹어볼 만하다. 단절에서 출발한 작업이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온기를 모으고 연결하는 행위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오스틴의 캐노피 단지에 예약제로 운영되는 작업실을 두고 하이 로우 프린트 컴퍼니(High Low Print Co.)를 이끄는 그녀의 일정은 당분간 쉴 틈이 없어 보인다. 태국 치앙마이의 헬로 프린트 프렌드 스튜디오 레지던시 일정을 소화한 뒤, 다시 오스틴으로 돌아와 2026년 제본가 길드(Guild of Bookworkers) 우수성 표준 컨퍼런스에서 기조연설을 맡을 예정이다. 그녀의 끝없는 작업 여정은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카푸어가 런던의 갤러리 한가운데에 깊고 서늘한 심연을 뚫어놓으며 우리의 감각을 통째로 삼켜버렸다면, 그라토비치는 텍사스의 덥고 북적이는 작업실에서 그 심연 아래 가라앉았던 기억의 파편들을 매일같이 깎고 찍어내 실체 있는 무언가로 박제하고 있다. 공간을 휘어잡는 핏빛 조각이든, 지독한 수작업이 빚어낸 사람 크기의 목판화든, 어쩌면 이들이 이토록 거대한 스케일로 보여주려 한 것은 우리가 미처 다루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 방치해 둔 묵직한 결여의 감각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