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 사진 페스티벌에서 만나는 뒤집힌 세계

위기의 시대, 사진이 전하는 메시지
세계 곳곳이 위기에 휩싸이고, 분쟁과 정치적 격변, 핵전쟁 위협이 끊이지 않는 요즘, 일본의 저명한 사진작가 가와다 기쿠지의 작품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핵의 흔적
올해 프랑스 아를에서 열린 ‘르콩트르 드 아를’ 사진 페스티벌에서는, 가와다 기쿠지의 대표작 ‘지도’ 시리즈가 처음으로 대규모로 공개됐다. 이는 80년 전 핵폭탄 투하 직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방문하며 촬영한 사진들로, 교토그래피 페스티벌과 시그마가 공동 주최했다. 가와다의 사진들은 핵참사의 상흔과 인간의 트라우마를 예술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정치적 은유와 역사적 무게감을 깊게 담아낸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예술 세계
수십 년에 걸쳐 진화해 온 가와다의 작품 세계는, 변화하는 시대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시각적 언어를 만들어간다. ‘마지막 우주론’ 연작에서는 9·11 테러를 반복적으로 다루며, 하늘을 마치 비극의 무대처럼 표현한다.

이브 생 로랑을 기리는 전시
이번 페스티벌에서 돋보이는 또 다른 전시는 사이먼 베이커와 엘사 얀센이 기획한 이브 생 로랑의 삶과 작품에 대한 헌정이다. 어빙 펜, 기 부르댕, 애니 레보비츠 등 패션 사진의 거장들이 남긴 대표작이 모여 시각적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특히, 생 로랑의 생애를 따라가는 친밀하고 우아한 초상사진들은 단순한 디자이너를 넘어, 문화적 아이콘으로서의 면모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브라질 현대 건축과 사회 변화
한편, 브라질 상파울루의 현대 건축을 기록한 FCCB(포토 시네 클럽 반데이란테) 소속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작품은, 1939년부터 1964년까지 콘크리트 구조의 미학을 통해 도시의 성장 과정을 담아냈다. 건축적 혁신을 기리는 동시에, 급속한 도시화가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함께 드러난다.

로스앤젤레스의 빛과 순간 – ‘Fade to West’
LA의 파헤이/클라인 갤러리에서는 폴 재스민과 토드 위버가 함께한 사진전 ‘Fade to West’를 선보인다. 두 작가는 로스앤젤레스의 빛과 일몰, 그리고 이 도시만의 아련한 아름다움을 포착해냈다. 캘리포니아 출신이 아니었던 두 사람은, 어느새 그곳의 문화와 정체성을 깊게 체화하며, 풍경과 인물, 그리고 잡히지 않는 공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재스민은 LA의 젊음과 친밀함, 그리고 일상의 따뜻한 온기를 사진으로 그려내며, 도시의 독특한 분위기와 소소한 순간을 포착했다. 그의 사진에서는 도시가 매우 개인적이고 섬세하게 느껴진다.

위버는 바람이 부는 사구, 햇살 가득한 파도, 변하는 지평선을 아날로그 사진과 카메라 실험 기법으로 담아낸다. 각 프레임은 움직임과 시간, 분위기를 명상하듯 표현하며, LA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함께, 두 작가는 캘리포니아를 이상향이나 환상이 아닌, 찰나의 빛으로 살아 숨 쉬는 진짜 공간으로 그려냈다. ‘Fade to West’는 폴 재스민이 생전에 직접 참여한 마지막 프로젝트로, 그가 LA에 바친 예술적 열정과 애정을 기념한다.

폴 재스민의 삶과 유산
1935년 몬태나주 헬레나에서 태어난 폴 재스민은, 미국의 사진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 교육자였다. 초기에는 화가와 배우로 활동했으나, 1970년대부터 친구 브루스 웨버의 권유로 사진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젊음, 순수, 성적 긴장감 등 다양한 주제를 몽환적인 이미지로 연출하며, 관객을 매혹적인 세계로 이끌었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하여, 꿈과 현실, 아메리칸 드림, 찰나의 아름다움에 대한 평생의 탐구를 담아냈다. Vogue, GQ, W, Interview 등 유수의 매체와 여러 브랜드 캠페인에서 활약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Hollywood Cowboy’(2002), ‘Lost Angeles’(2004), ‘California Dreaming’(2010)이 있다.

재스민은 패서디나의 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상상력의 힘을 믿고 후학 양성에 헌신했다.